2015년 3월 5일 목요일

불우잇울을 위해 목도리 100개 만들어 전달...(하나님의교회&이웃사랑실천&봉사활동)

하나님의교회&이웃사랑실천&봉사활동

불우이웃을 위해.. 
목도리 100개 만들어 전달..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 진주 교회 신도들이 선교활동 외에도 다양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 지역사회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이 교회 신도들은 24일 진주시 성북동 일대에 거주하는 독거노인들에게 목도리 100개를 전달했다. 봉사활동에는 진주 하나님의교회 부녀부 소속 130여명이 교육관에 모여 목도리 뜨개질을 하며 참여했다.




또 뜨개질을 위해 대구 서문시장에서 100만원 상당의 실을 사오기도 했고 삼삼오오 탁자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며 정성을 담아 뜨개질을 했다. 이들은 100개의 포근한 목도리를 만들기 위해 교대를 하며 작업 능률을 놀리기도 했다.

완성된 목도리는 신도들이 어르신 가정을 방문해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김경옥(83, 진주시 계동)씨는 "혼자 있다는 외로움에 추위가 더욱 춥게 느껴진다. 정성껏 만든 목도리를 하면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 평생 잊지 못할 값진 선뭉르 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봉건 목사는 "직접 만들어 마음과 정성이 듬뿍 담은 만큼 홀로 사시며 외로움을 겪고 있는 어르신들이 목도로릴 보며 힘을 내는 등으로 행복한 이웃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출처 : 국제신문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50224.99002193126

2015년 3월 3일 화요일

양평읍 하나님의교회 이웃돕기로 사랑실천 (하나님의교회&자원봉사)

(하나님의교회&자원봉사)

양평읍 하나님의교회
이웃돕기로 사랑실천





경기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에 소재한 하나님의교회(대표목사 황명수)에서는 지난 13일 관내 어려운 이웃에게 백미 13포(10kg)와 김 선물세트를 기부했다.

황명수 목사는 "아주 작은 정성이지만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이 설 명절을 보내는데 작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날 하나님의 교회 목사와 신도들은 직접 가정을 방문해 후원품을 전달하면서 어려운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앞으로도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이창승 양평읍장은 “우리 지역의 종교단체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앞장서 주심에 감사하다”며 “소외된 이웃들이 설 명절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출처 : 경기 e-조은뉴스 http://kggoodnews.co.kr/n_news/news/view.html?no=8368


2015년 3월 1일 일요일

시온을 건설하라 (하나님의교회&아버지하나님&패스티브닷컴)

(하나님의교회&아버지하나님&패스티브닷컴)

[ 아버지 하나님 ] 
시온을 건설하라

30세에 왕위에 오른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시온성을 정복했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다윗 왕과 2천 년 전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두 인물의 관계는 성경 곳곳에 예언과 성취로 나타나 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에스겔 37:24~25)


에스겔 선지자는 다윗이 왕이 되리라고 예언했다. 난해한 점은 이미 다윗 왕이 죽은 지 약 450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이를 고려해 볼 때 이 예언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실제 다윗 왕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도 예수님께서 다윗의 예언을 이루셨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누가복음 1:31~32)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다윗 왕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실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후 그의 생애에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사무엘하 5:7~10)



30세에 왕위에 오른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시온성을 정복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오랫동안 정복하지 못했던 시온성이 다윗에 의해 정복되었다.



다윗의 이 역사를 또 다른 다윗인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루실까. 예언상 다윗이 곧 예수님이기에 다윗이 이룩한 시온성 건축 역사는 예수님께서도 반드시 이루셔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건축하실 시온성은 다윗이 세웠던 한낱 건축물이 아니었다.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이사야 33:20)



이사야 선지자는 시온을 두고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시온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건축할 시온은 바로 이런 곳이다. 다윗의 예언을 이루되, 무너져 없어질 건축물이 아닌 절기 지키는 시온을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절기다.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 시온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시온을 세우기 앞서 먼저 하나님의 절기를 정립해주셨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절기에는 제자들과 함께 지킨 유월절, 초막절이 있으며, 사도들이 지킨 오순절에는 성령을 내려주셨다. 그리고 주간절기인 안식일이 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7, 26~28)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복음 7:2, 37)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4)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실지로 시온성을 정복하고 수축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절기를 정립해주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시온성을 건설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시온의 절기들이 사도시대 말경부터 차츰 변경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사단 마귀는 급기야 하나님의 절기를 모두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다니엘 7:25)



다니엘 선지자는 사단 마귀에 의해 하나님의 진리가 무자비하게 짓밟힐 것을 예언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성도가 괴롭힘을 당하고, 하나님의 때와 법인 절기와 계명들이 변개됐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시온성의 무너짐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시온성은 하나님의 절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 시온성이므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면 시온성도 없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사단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시온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절기들을 변경시킨 것이다.



AD 321년에 토요일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하고, AD 325년에는 유월절을 폐지, 이후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교회로 들여오므로 하나님의 절기는 모두 사라졌다. 하나님의 절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곧 시온이 황폐화됨을 의미한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이사야 51:3)



다니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절기가 변경될 것을 예언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시온이 황폐할 것을 예언했다. 이는 같은 말씀이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살펴보면 시온이 다시 위로를 받을 것과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하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절기가 없으므로 절기를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도 없어 황폐했던 시온이, 다시금 절기를 지키는 백성들의 감사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시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모여 절기를 지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말일에 대한 예언 속에 시온을 언급했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가 4:1~2)



말일(末日)은 곧 마지막 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많은 민족과 이방들이 여호와의 산 곧 시온으로 몰려갈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초림 예수님께서 세워주셨던 시온은 사단에 의해 시련을 당하지만 결국 다시금 세워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예언이다.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시편 102:16~22)



하나님께서 시온을 건설하시리라는 이 말씀 가운데 ‘건설’이 영어 성경에는 ‘rebuild’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재건’을 의미한다. 즉 이 시대 하나님께서 사단에 의해 무너졌던 시온을 다시금 세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온은 누가 세워주실까.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시편 87:5)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시온은 다윗이 세웠으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절기 지키는 시온은 오직 하나님만이 세우실 수 있다. 초림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시온, 사단 마귀에 의해 무너졌던 시온은 오직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야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시온을 재건할까. 이는 초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절기를 정립함으로 시온을 세우셨던 것처럼, 재림 예수님께서도 사단에 의해 짓밟힌 하나님의 절기를 재정립함으로 시온을 세워주신다. 이는 시온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기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결코 무너졌던 시온이 재건될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절기를 회복해주심으로 시온을 재건해주신 이 시대의 구원자는 과연 누구일까.



출처:패스티브닷컴

2015년 2월 26일 목요일

하나님의교회&아버지하나님&패스티브닷컴

하나님의교회&아버지하나님&패스티브닷컴


[ 아버지 하나님 ] 
마지막 아담은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첫 사람, 아담은 이렇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또 다른 아담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일까.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영혼을 그 속에 넣자 비로소 아담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탄생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이렇게 창조된 아담은 그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했다. 후에 아담은 930세라는 나이로 죽기까지 가인과 아벨 등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구약성경 창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것이 아담의 일생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아담을 두고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창조된 아담은 분명 한 사람인데 성경에서는 첫 사람 아담이 있고 마지막 아담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씀 가운데 두 아담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며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다. 첫 사람 아담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하나님께서 흙으로 육체를 만들어 그 속에 영혼을 불어 넣어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탄생시킨 아담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은 누구인가. 마지막 아담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살려주는 영’이라는 점이다. 이로 보건대 마지막 아담은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주기 위해 오시는 구원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14)



아담을 오실 자에 대한 표상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실 자’는 성경 맨 마지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오실 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 즉 재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오실 자’를 표상하는 아담은 바로 재림 예수님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아담 또한 마지막에 등장하시는 재림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살려주는 영’으로 오시는 마지막 아담인 재림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류를 살려주실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4)



마지막 아담인 재림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다. 과연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떻게 먹고 마신단 말인가.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마태복음 26:17~19)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떡을 당신의 살로, 유월절의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살려주는 영’인 마지막 아담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다.



마지막 아담의 예언 그대로 유월절을 가지고 오신 재림 예수님은 과연 누구일까.

출처:패스티브닷컴

2015년 2월 24일 화요일

(세례와침례&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세례와침례&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세례와 침례

세례나 침례는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 신성한 예식이다. 신앙의 최종 목적인 구원으로 향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예식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세례는 죄를 물속에 씻는다는 의미고, 침례는 죄를 물속에 장례 지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비기독교인들이야 두 예식의 차이를 별반 느끼지 못하겠지만 실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예식들의 차이점을 교리비교를 통해 살펴보자.

세례

1. 근거

세례(洗禮)의 한자는 씻을 세(洗), 예식 례(禮)다. 성경에서는 죄를 적은 양의 물로 씻어서 사했다는 세례식의 기록은 없다. 단지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세례 의식은 초기 기독교가 예루살렘을 시작해 소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로 전파되면서 생겨났다. 당시 무역이나 여행에서는 불가피하게 사막을 지나야 했고 물이 귀한 사막에서 복음을 들은 후 새 삶을 찾고자 예식을 행해야 하는 경우, 많은 양의 물을 사용할 수 없어 물을 조금 뿌려 약식으로 행하는 세례식을 베풀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행해졌던 이 예식은 A.D. 120년경 많은 교회로 전파됐다.



2. 교단

세례식은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에서 행해지고 있다.



3. 결론

세례식은 성경에 기인하고 있지 않다. 예식 자체가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의미 정도만 성경에 두고 행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있는 셈인 것이다. 세례식으로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방법으로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죄 사함, 즉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국내 한 포털사이트에는 세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서의 세례는 물에 몸을 담그는 방식이었다. 즉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하던 대로 강이나 호수의 물속에 완전히 몸을 담가야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침례

1. 근거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행하게 하셨다.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3~17)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받은 침례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침례(浸禮)의 한자는 잠길 침(浸), 예식 례(禮)다.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다. 몸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는 의미다. 간단하게 세례식을 행했다면 굳이 물에 내려가서 온몸을 적시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요단강 속으로 함께 내려가 침례식을 행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죄 사함의 의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



2. 교단

오늘날 침례를 행하는 교단에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있으며 그 외에도 침례교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이 있다.



3. 결론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구원의 표인 ‘침례’를 거론하고 있다. 침례는 온몸을 물에 적시거나 담그는 예식으로 반드시 ‘침수’가 원칙이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현 재무부 장관급인 내시에게 베풀었던 예식도 세례가 아닌 침례였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 (사도행전 8:35~39)



이 두 사람의 행위 속에서 침례라는 예식의 시급함을 짐작할 수 있지만, 고관대작으로서 조금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고 깨끗한 물 한 병으로 얼마든지 예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세례가 올바른 예식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침수’를 원칙으로 하는 침례식은 물 한 병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비록 하천에 흐르는 물이라도 온몸을 적셔야 하는 침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깨끗한 옷 정도는 버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의 결단을 보면서 천국을 향한 그의 믿음과 당시 행해졌던 죄 사함의 의식이 바로 침례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침례는 깨닫는 즉시 행해야 한다. 6개월이나 1년간의 학습 후 침례를 행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침례를 즉시 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생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한 시간 후 또는 일 분 후에도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침례를 베푼 후에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 섬네일 출처: 니콜라 푸생 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출처:패스티브닷컴)

2015년 2월 22일 일요일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안식일)

(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안식일)
[안식일]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이라도 원석(原石)이었을 때는 돌덩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만일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갖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며, 혹 갖게 되더라도 아무 데나 방치해 두었다가 누군가 달라고 하면 선뜻 내주기 쉽다. 무엇이든 가치를 알지 못하면 경홀히 여길 수밖에 없고, 결국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오직 가치를 아는 자만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 하신 일곱째 날 안식일도 이와 같다. 안식일은 단지 ‘예배를 드리는 날’이 아니라 우리 영혼에 있어 보배로운 날이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숭고한 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보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안식일의 참된 가치를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이사야 56:2)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이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신 일과 ‘안식(安息)’이라는 단어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말 그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안식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시며 그날을 복을 주고 거룩하게 하셨다. 이 말은 일곱째 날 자체가 복을 받고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날을 지키는 백성들이 복을 받는다는 의미다.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에스겔 20:12)



또한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대해 기술할 때,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반복적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 하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더 이상 이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6일 창조에 대한 예언이 6천년 구속사업에 대한 예언으로, 7일째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처럼 7천 년째부터는 더 이상 시간의 끝이 없는, 영원한 안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대한 예언은 아직 다 성취되지 않았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베드로후서 3:8)”는 말씀과 같이 6일 창조의 역사는 6천 년간 이루시는 영적 창조, 즉 구원의 역사를 예표한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은 7천 년째 당하는 안식 천년의 예언으로써, 구원받은 자녀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왕 노릇하며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0:4~6, 22:5).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편안히 쉬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이 땅에서는 아무리 편히 쉰다고 해도 실상 쉬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것, 편안한 것도 잠시간일 뿐 그조차도 여전히 힘이 들기 때문이다(전도서 1:8, 2:22).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안식은 다르다. 사망도, 눈물도, 애통함도, 고통도, 아픔도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되는 그야말로 ‘완전한 안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이처럼 안식일은 엄청난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에게만 이 모든 은혜를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약속은 아직도 효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말씀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그 안식처에 들어갈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먼저 기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이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자기 일을 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다가 멸망한 사람들처럼 되지 말고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히브리서 4:1~11, 현대인의성경)



구약시대 하나님께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신약시대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천국으로 인도하셔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축복해주신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안식일을 세상 끝 날까지 지키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24:20).



하나님의 뜻이 모두 이루어질 때, 안식일의 가치를 깨달아 굳이 잡고 있었던 인생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매주 일곱째 날마다 이 보배를 우리에게 값없이 나누어주고 계신다.

(출처:패스티브닷컴)

2015년 2월 18일 수요일

어떤초대(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패스티브닷컴)

어떤초대(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패스티브닷컴)


[어머니 하나님]
어떤 초대

한 나라의 왕 혹은 대통령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퍽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런데 당신은 곧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초대를 받게 될 것이다.




1937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 2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제목은 '신부 실종'이다.
기사는 혼인을 일주일 앞둔 신부 김영자의 행방을 찾는 내용이다.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신부가 없어지다니, 신랑과 가족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성경에도 이 사건과 흡사한 내용이 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이 가득한지라...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마태복음 22:1~14)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신부가 보이지 않는다.
신랑과 하객은 있는데 혼인잔치의 주인공이자 꽃이라 할 수 있는 신부는 어디로 갔을까.
혹자는 "성경의 신부는 성도들"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그 주장이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 속 신랑은 예수님 자신이며 청한 사람들은 성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9:15, 마가복음 2:20, 누가복음 5:35)

이 말씀에서는 청한 사람들, 즉 성도를 혼인집의 손님들이라 비유하셨다. 
하객을 불러놓고 신부 대신 결혼을 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성도는 결코 신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신부는 누구일까.
신부가 언급되지 않았떤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천국 혼인잔치가 성대히 열리는 장면을 기록하며 아내, 즉 신부를 언급해놓은 책이 있다. 요한계시록이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요한계시록 19:7~9)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리는 모습과 그의 신부, 청함을 받은 손님들을 계시로 보았다.
청함을 입은 복 받은 자들은 당연히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아내는 누구있가.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요한계시록 21:9~10)


신부의 모습을 보고 싶은 사도 요한의 요청에 천사가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다.
이 하늘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한 사도 바울의 증거를 보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라디아서4:26)


신부를 일컬어 요한은 어린양의 아내라 했으며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말했다.
그 예루살렘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 어머니라고 설명했다.
우리 아버지의 아내는 당연히 우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성도인 우리는 과연 하늘 어머니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으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아버지 하나님만 믿어온 기성교인이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잣대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사야 62:6~7)


예루살렘이 단순히 성벽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찬송을 받게 하시겠는가.
세상에서 찬송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즉, 이 말씀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사도 바울이 증거한 우리의 어머니 즉, 하늘 어머니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예루살렘을 세운다고 하셨는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영적 예루살렘이신 하늘 어머니는 아무나 세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섬기고 알아야 하는 하늘 어머니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세워줄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도 알려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22~23)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든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오자 아담은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며 '여자'라 칭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에 아담과 하와는 단지 아담과 하와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14)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0)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성경 맨 마지막에 '오실 자'에 대해 언급했다. 바로 예수님이다.
즉 아담은 오실자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아담이 예수님을 나타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아담이 하와를 일컬어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머니 하나님을
증거해 주실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세기 3:20)


또한 아담의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준 것도 아담이다.
하와라는 이름의 뜻은 '생명'이다.
이 말씀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하늘 어머니를 알려주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세워주신 분이 바로 우리의 영혼을 낳으시고 구원하실 하늘 어머니다.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ㅁ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성경과 신부,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 나아온 자들이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복 받은 자들이다.

출처:패스티브닷컴